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 위 리즈 (문단 편집) === 다저스의 레전드 유격수가 되다 === || [[파일:external/static.ddmcdn.com/pee-wee-reese-hof-1.jpg]] || 1940년,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시즌 첫해 뒷꿈치 부상으로 84경기만 출장했지만 .272 5홈런 15도루를 기록하며 데뷔 첫해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이듬해인 1941년부터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1941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즈]]와의 맞대결을 펼쳤는데 .200의 타율, 4경기 3실책이라는 좋지 않은 성적으로 결국 준우승에 머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47년, 1949년에는 각각 12홈런 104타점, 16홈런 116타점을 올리며 뜨거운 방망이를 가동하기도 했고 타율도 꾸준히 2할 6푼 이상을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스탯을 보였다. 무려 47에러를 기록한 시즌도 있긴 하지만 통산 레인지팩터가 4.94에 이르는 좋은 유격수였다. 컨택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통산 [[타율]]은 .269에 그치나 대신 뛰어난 선구안으로 통산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은 타자였다. 게다가 16시즌을 뛰면서 올스타전 명단에 10번이나 뽑힌 적이 있었으며, 그가 뛰었던 1940년~1958년까지 피 위 리즈보다 많은 안타를 기록한 타자는 단 4명뿐이었고 볼넷을 많이 얻은 타자는 3명 뿐이며 도루를 많이 한 선수는 1명뿐인 것만 보더라도 그가 당대 최고의 유격수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스탯만으로 따졌을 때 통산 타율 .269에 2000안타(정확히는 2170)를 겨우 때려낸 성적만 보자면 유격수라는 점을 감안해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고, 실제로 기자단 투표로는 가지 못했다. 대신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을 통해 1984년 들어갈 수 있었다. 어쨌든 명전 입성 자체가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youtube(F9LZ3HlUSFw)]|| ||1984년 명예의 전당 입성 기념 축사를 하는 피 위 리즈 || 다만 클래식 스탯이 아닌 [[세이버메트릭스|세이버]] 스탯으로 따질 경우에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는데, 피 위 리즈의 통산 [[WAR]]는 68.2([[베이스볼 레퍼런스|b]]WAR)[* 참고로 2020년 기준 다저스 구단 통산 WAR 2위에 해당한다. 1위는 [[클레이튼 커쇼]]의 69.6.]/61.3([[팬그래프|f]]WAR)으로 야구 외적인 요소와 전혀 상관없이 성적만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유격수 루 보드로의 통산 WAR 63.0이나 [[어니 뱅크스]]의 통산 WAR 67.6, [[루이스 아파리시오]]의 통산 WAR 55.7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수치이다. 달리 말하자면, 세이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피 위 리즈는 인성이나 [[재키 로빈슨]]과의 에피소드 같은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따져봐도 명전에 입성할 자격이 충분한 선수라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그의 연 평균 WAR은 4.2(bWAR)/3.8(fWAR)로, 대략 [[데릭 지터|지터]]와 비슷한 수준이다.[* 정확히는 피 위 리즈의 근소 우위. 지터는 20시즌을 뛰면서 71.8(bWAR)/71.7(fWAR)을 기록했으므로 연평균으로 따지면 약 3.6 정도이다. 양쪽 모두 40세 시즌이 마지막이고 선수로 활동한 기간도 지터가 20년, 피 위 리즈가 19년으로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커리어 평균 WAR을 비교하는 데 있어 적어도 나이 면에서는 그런대로 비등한 조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피 위 리즈의 WAR이 이렇게 높은 것은 16년간 유격수 외길(마지막 두 해는 3루수로도 좀 나왔지만)을 걸은데다가 [[선구안]]이 역대급으로 좋은 선수[* 그가 얻은 1210개의 볼넷은 메이저리그 역대 57위(2016기준)인데 볼넷 상위권 선수들은 대부분 홈런을 수십씩 때리는 거포들이라 [[고의사구]]로 얻어낸 볼넷도 적지 않은 반면에, 피 위 리즈는 장타력이 없는 선수라 순전히 눈야구로만 얻어낸 결과다. 비슷하게 교타자로서 선구안이 좋은 선수는 [[웨이드 보그스]] 정도.(볼넷 1412개. 단 피 위 리즈 보다 선수생활이 2년 길었다.)]였기 때문에 출루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발도 빠른 편이라 30도루로 도루왕도 먹은 적 있고 20+도루도 여러번 기록한 적 있으므로 이 점도 플러스 요인이다. 아무튼 타율때문에 본인도 자기 성적이 저평가 되는게 좀 불만이었던지 "만약 다시 선수 생활을 한다면 좀 더 배트를 휘두르겠다. 내가 얻은 1200개의 볼넷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If I had my career to play over, one thing I'd do differently is swing more. Those 1,200 walks I got, nobody remembers them.)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출루율을 타율보다도 중시여기는 2010년대 이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당연히 명예의 전당 직행일 것이다. 또한 피 위 리즈는 2차대전에 참전하는 바람에 선수로서의 전성기 3년을 그냥 보냈다.[* 그것도 선수생활 전성기의 시작인 24살부터 26살까지. 참전 직전 해에도 올스타에 뽑혔고, 전역한 직후에도 올스타에 뽑혔으니 그야말로 선수 인생의 황금기를 터트리고도 남았을 시절이다.] 만약 이 시절에도 선수로 뛰었다면 80에 근접 혹은 넘어서는 통산 WAR에 2500+ 안타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피 위 리즈가 참전 직전 시즌에 5.5, 전역 직후 시즌에 5.6 fWAR을 기록했으므로 참전 기간 동안 연평균 5.6 fWAR 정도를 기록할 수 있었다고 가정하면 그는 커리어 통산 78.1 fWAR을 기록할 수 있다. bWAR로 따진다면 참전 직전 시즌에 5.7, 전역 직후 시즌에 6.0 bWAR을 기록했으므로 참전 기간 동안 연평균 5.9 bWAR 정도를 기록했으리라 가정하고 계산했을때 83.9 bWAR이 나온다. 안타의 경우에도 피 위 리즈가 첫 해와 마지막 2시즌을 제외하고는 13년동안 항상 136개 이상의 안타를 쳐줬으므로 만약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선수로 뛰었다면 아무리 박하게 잡아도 안타를 408개 이상은 칠 수 있었을 것이다.] 후대의 선수들과 통산성적으로 비교할 때는 이러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 [[밥 펠러]], [[테드 윌리엄스]] 등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다른 선수들도 피 위 리즈와 마찬가지로 통산기록에서 크게 손해를 봤다.] 선수시절 7번의 월드시리즈 진출로 비[[뉴욕 양키스|양키스]] 소속 선수 중에서 월드시리즈를 가장 많이 경험한 선수다. 7번 모두 양키스와 붙어서 6번의 준우승의[* 1955년에 첫 우승을 겪을때까지 5번이나 양키스에게 우승을 헌납] 아픔을 겪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